‘육조고도(六朝古都)’, 난징(南京)

[2016-10-02, 06:30:11]
중국의 고도②
‘육조고도(六朝古都)’, 난징(南京)


 

 

지금으로부터 약 7000~8000년 전, 신석기 시대 때부터 존재한 중국의 고도는 어디일까? 바로 ‘난징(南京)’이다. 난징은 유리한 지리적 위치와 수려한 경관으로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주춧돌 역할을 해왔다. 중국의 여러 왕조에게 사랑 받은 그곳에 대해여 알아보자.

 

육조시대의 중심지
초기의 난징은 초나라의 작은 읍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금릉(金陵)’이라 불리다가, 진나라 때 진시황에 의해 이름이 ‘말릉(秣陵)’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난징이 오늘날 중국의 대표적인 고도로 손꼽히는 이유는, 육조 시대를 보면 알 수 있다. 난징의 별칭은 ‘육조고도(六朝古都)’이다. 이 별칭이 붙은 이유는, 오(吴)나라의 손권을 시작으로 동진(东晋), 송(宋), 제(齐), 양(梁), 진(陈)의 6개 왕조가 난징을 수도로 택했기 때문이다. 난징은 무려 342년 동안 한족 왕조의 도읍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손권은 말릉이라는 이름을 ‘건업(建业)’이라 바꾸고, 오나라의 도읍으로 정했다. 건업은 후에 ‘건강성(建康城)’으로도 불리며 육조 시대 동안 강남의 대도시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인구 수가 100만이 넘은 최초의 도시이기도 했다. 여러 왕조의 도읍으로서 번성했던 만큼, 남북조 문화를 이끌어간 도시 역시 그곳이었다.
수당(隋唐) 시대에는 북방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 전과 같은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요점 덕분에 여전히 경제적, 문화적으로 부흥했다. 이 덕분에 당대 유명한 시인인 이백(李白), 유우석(刘禹锡) 등이 난징에 거주하며 걸작들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명(明)의 수도가 되다



14세기 말, 몽골의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운 주원장 역시 난징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했다. 명이 세워지기 전, 난징은 ‘응천부(应天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원장에게서 받았다. 그곳이 반원 세력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주원장에게 선택 받으면서 육조 시대 후 무시 당했던 과거를 잊고, 다시금 급부상하게 되었다. 후에는 현재의 명칭인 ‘난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 난징은 이 때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전성기도 오래 가지 못했다. 영락제의 즉위 직후, 명은 베이징으로의 천도를 결정했다. 수도가 베이징으로 바뀐 이후에도, 난징은 명의 주요 도시로서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난징 대학살, 그리고 지금의 난징



그렇게 다시 한번 왕조가 바뀌어 청(清)조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은 ‘난징조약’을 맺었다. 한국의 강화도조약과 같이, 난징조약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렇듯 청의 국세가 계속해서 불안정한 증세를 보이자, 태평천국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태평천국의 수도가 난징이었다. 운동으로 인해 잠시 이름이 ‘천경(天京)’으로 바뀌었으나 11년만에 태평천국 운동이 실패하면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청 왕조가 몰락하고, 1911년 12월 29일 쑨원(孙文)을 중심으로 한 중화민국이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이듬 해, 중화민국의 임시정부가 난징에 세워지고, 1927년에는 정식 수도로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북방의 국민 개혁군의 계속된 공세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계속해서 발전해나갔다. 1927년부터 1937년까지 난징의 화려했던 10년을, 오늘날 사람들은 ‘황금십년(黄金十年)’이라 칭한다. 10년동안 대규모의 도시 개발이 이루어져 1937년에 집계된 도시 총 인구가 100만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3일, 난징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그곳에 발을 들인 일본군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했다. ‘난징대학살’, 절대 일어나서는 안됐던 일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일본군은 국민당의 잔당을 처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에 입성했다. 그리고 무고한 시민들을 보이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부터 심지어 임산부까지 일본군의 손에 처참히 목숨을 잃었다. 10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내기까지 하는 등 일본군의 횡포는 실로 엄청났다. 6주동안, 대략 10~20만명의 사람들이 난징에서 죽어나갔다. 그 후, 드디어 중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가 난징으로 거처를 옮겨 또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조짐이 보였으나,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 난징은 장쑤성(江苏省)의 성도(省都)로 임명되었다가 직할시, 그리고 다시 성도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94년, 부성급(副省级)시로 승격이 되었다.

 

난징의 유적지
명효릉(明孝陵)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난징에는 유적지 또한 매우 다양하다. 수많은 유적지 중, 유독 옛 위인들의 무덤이 눈에 띈다. 먼저, 명효릉(明孝陵)이 대표적인 유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명효릉의 주인은 명 태조 홍무제이다. 무덤을 짓는 데에만 30여 년이 걸렸을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 차례에 걸친 전란에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현재는 능의 일부만 감상할 수 있다.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효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을 만큼 중국 역사상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지이다. 현재, 그곳 시민들의 휴식지로도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개방 시간 오전 6시 30분~오후 6시
•입장표: 성인 70元, 학생 35元

 

중산릉(中山陵)


 

 

난징의 또 다른 유명한 유적지는, 중산릉(中山陵)이다. 중산릉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쑨원의 무덤이다. 이 역시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약 3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무덤이다. 또한, 총 면적 약 20㎢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원래 황제의 무덤에만 붙였던 ‘능’이라는 글자를 이름에 붙일 정도로, 중국 사람들의 쑨원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하다. 중산릉은 무덤의 주인 말고도 그 수려한 장관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삼림공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다. 난징에 가서 이 중산릉을 들르지 않으면, 제대로 다녀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정도로 중산릉은 난징의 수많은 유적지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다.
•개방 시간 오전 8시 30분~오후 5시
•입장표: 무료

 

이렇듯 난징은 중국의 긴 역사 속에서 문화의 최대 중심지이자 나라의 기틀을 다져주는 수도로서 중국사에서 주 무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명승고적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관광지로서 각광받고 있다. 앞으로도 중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난징은 중국의 대표적인 고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을 것이다.

 

고등부 학생기자 여지원(상해한국학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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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견 수 1

  • LEE WON HO 2021.12.12, 08: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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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체 한자는 병기해 봐야, 큰 도움이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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