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도④ 화하(華夏)문명의 발상지 ‘뤄양(洛阳)‘

[2016-10-16, 07:48:21]
중국의 고도④
화하(華夏)문명의 발상지 ‘뤄양(洛阳)‘


 

뤄양은 허난성(河南省) 북서부 뤄허강(洛河: 뤄수이 강이라고도 불린다)에 위치한 도시이며, 중국의 7대 고도(古都)의 하나이다. 근처에 황하(黄河)가 흐르고 있어 외부에서부터 물자가 많이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 역대 9개 왕조의 수도였던 뤄양은 경제적으로 발전된 도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경제적 성장 덕분에, 당나라 이후 시대부터 현재까지 뤄양에는 부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뤄양의 명칭
뤄양의 ‘뤄(洛)’는 도시가 위치해 있는 뤄허강(洛河)에서 따온 글자고, ‘양(阳)’은 ‘강의 북쪽 연안’이라는 뜻이다. 즉, 뤄양이라는 이름은 ‘뤄허 강의 북쪽 연안에 있는 도시’를 의미한다. 뤄양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리 불리었는데, 기원전 11세기 주나라 때에는 낙읍(洛邑)이나 낙주(洛州)로도 불리었고, 사람들이 위나라의 대표적 수도라고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위경(魏京)’, 당나라 때에는 ‘동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동도(东都)’라고도 불리었다.

 

9개 왕조가 선택한 곳



주나라의 무왕은 뤄양을 ‘도읍을 세울 만한 곳’이라고 했다. 이 말 그대로, 뤄양은 많은 왕조들이 도읍으로 세워 경제적으로 번창하게 만든 곳이다. 하나라(夏: BC 2070~BC 1600), 상나라(商: BC 1600~BC 1046), 주나라(周: BC 1046~BC 256) 때에 뤄양을 수도로 지명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뤄양을 수도로 세운 중국 역대 9개 왕조는 동주(东周: BC 771~BC 256), 후한(后汉:AD 25년~AD 220년), 위(魏:220년~265년), 서진(西晉:265년~317년), 북위(北魏:386년~534년), 수(隋: 581년 ~ 619년), 당(唐:618년~907년), 후량(後梁: 907년~923년), 후당(后唐:923년~936년)이다.

 

뤄양의 번영을 이끈 대표적 왕



뤄양을 번창한 대도시로 발전시킨 왕들과, 뤄양을 둘러싼 악명 높은 왕들도 있다. 대표적 왕으로는 고조 유방(劉邦: 한나라), 세조 유수(劉秀: 한나라), 동탁(董卓: 후한 말), 조조(曹操: 위나라), 문제 조비(曹丕: 위나라), 양제 양광(楊廣: 수나라) 등이 있다.
고조 유방과 세조 유수는 뤄양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모두 번영한 대도시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특히 이 두 왕의 시대에는 황하 강을 통해 외부에서 물자가 많이 들어와 뤄양의 발전에 큰 힘이 되었고, 황하 강의 이점은 다음 시대에도 자주 쓰이게 된다.

 


동탁은 뤄양 시민들 사이에서 제일 악명 높은 왕으로 알려져 있다. 후한 말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동탁(董卓)은 부패하고 온갖 폭정을 휘둘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하여 동탁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반격을 당한 동탁은 장안으로 도망치면서 뤄양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 사건에 의해 동탁은 현재 뤄양 시민들에게 여전히 엄청난 반감을 사고 있고, 심지어 시민들은 동(董)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한다고 한다.

 

 


조조는 <삼국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왕이다. 동탁으로 인해 뤄양이 불에 탔을 때 뤄양을 재건축할 것을 의뢰해, 뤄양을 다시 대도시로 복원한 장본인이다. 이후 그의 아들인 조비가 뤄양으로 다시 황궁을 세우고 많은 시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역대 가장 화려하고 번창한 도시로 부활, 대도시의 명예를 되찾았다.

 


양제 양광은 뤄양의 또 다른 악명 있는 왕인데, 황위에 오르고 동탁처럼 폭정을 일으켰다. 백성들을 강제로 토목 공사를 시켜 뤄양에 큰 대수궁을 짓게 하였고, 그의 아버지 문제 양견(楊堅)이 중단시킨 운하 공사를 재개시켰다. 또한 백성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무리하게 수도를 장안에서 뤄양으로 옮기려 했다. 양광의 폭정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불만을 가지게 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를 명말시킨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뤄양의 유적지


 


우선 북위 때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조성된, 중국의 불교문화를 잘 보여주는 룽먼석굴(龙门石窟)이 있다. 룽먼석굴은 중국 4대 석굴 중 하나로서 북위 시대 제7대 황제였던 효문제(孝文帝)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기면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석굴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북위 시대였고, 북위의 황제들이 작업을 지휘했다고 한다. 수나라와 초 당나라 당시에는 각종 민란 때문에 석굴 작업이 비교적 적었고 만들어진 석굴의 크기도 작았다. 그러나 당나라 당시에 석굴 사업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더욱 정교한 석굴이 만들어졌고, 당시 중국 예술의 절정기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다양한 크기의 석굴 안에는 약 10만여 점의 불상들이 있는데, 10만 여점의 불상들이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룽먼석굴은 중국의 문화적 깊이와 사회적 상황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높게 삼아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후한 말에 세워진 불교문화의 시초라 불리는 백마사(白马寺)도 뤄양의 역사적 유적으로 꼽힌다. 백마사는 후한 말, 뤄양에 세워진 중국 최초의 절이다. 후한 2대 황제였던 유장의 사신 채음의 간청으로 인도의 승려였던 가섭마등(迦叶摩腾)과 축법란(竺法兰)은 불상과 경전을 하얀 말에 싣고 중국에 왔다고 한다. 유장은 불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승려들을 살게 할 절을 세워 백마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정문 양쪽에는 두 마리의 백마상이 있고, 정문은 3개의 아치형 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개의 대문은 불교에 고난을 벗어나는 ‘3겹의 문’을 상징한다고 한다. 한나라의 건축 기술을 잘 보여주는 백마사는 한족지구불교전국중점사원으로 지정됐다.

 

고등부 학생기자 이수민(YCIS Y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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