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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에서 엿볼 수 있는 조선과 중국의 외교

[2021-11-03, 07:16:19] 상하이저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인류는 오랫동안 역사를 통해 실수을 배우고 고치며 발전해왔다. 이는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현재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중국은 우리나라 역사에 항상 등장해왔다. 중국은 때때로 동맹국으로, 또 다른 때에는 적국의 모습으로 한반도의 왕조들과 관계를 이어왔다. 수많은 왕조들 중 600년간 한반도를 지배한 조선은 중국의 왕조들과 어떤 외교를 했을까?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조선과 중국의 외교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 전기
사대 정책으로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으로서 명나라의 요동 정벌을 반대하며 위화도 회군을 한 이유 중 하나이다. “큰 나라” 중국과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뒤 당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대교린 정책을 펼친다. 이후 사대교린 정책은 조선 말까지 조선이 사용하는 가장 큰 외교정책이 된다. 

그렇다면 태조 이성계는 왜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는 화평하게 지낸다”는 뜻의 사대교린을 펼쳤을까? 위화도 회군 때부터 이성계는 고려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고려처럼 작은 나라가 아시아를 호령하던 강대국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격이었다. 요동 정벌을 반대하며 이성계가 명나라를 큰 나라로 부른 것은 사대, 즉 큰 나라를 섬기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명나라에 비하여 경제력과 군사력 중 무엇 하나 뛰어나지 않았던 고려로서는 명나라를 공격할 수가 없었다. 

전쟁과 주변 정세에 대하여 냉정하고 현실적이었던 이성계는 자신이 건국한 갓 태어난 국가 조선 또한 명나라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명나라의 조선을 독립된 자주국으로 유지하기 위해 친명정책을 선택한 것이다. 그 예로 1392년에 조선 건국 이후 태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요청하였고, 동시에 “화령”과 “조선”이라는 두 국호를 보내 조선이란 국호를 중국의 황제 홍무제로부터 선택받아 사용하였다. 명나라 황실에 상징적인 예의를 표하고 먼저 명나라를 강대국으로서 인정함으로써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을 피하였다. 

또한 매해 조공을 바침으로써 명나라라는 강대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다. 명나라는 사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의 정치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았고, 두 국가는 조선 초기에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조선의 초대 왕에 의해 확립된 사대정책은 강대국이었던 명나라와의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자주국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조선 초기부터 취해진 조선의 대표적인 외교 전략이었다.

조선 중기
중립외교로 조선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건져내다 

2012년에 고교 역사 교사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광해군은 '가장 재평가가 필요한 역사 인물”로 선정되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연산군과 함께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인 광해군은 왜 재평가가 필요할까? 서민정책과 임진왜란 동안의 활약 등 많은 이유가 거론되지만, 광해군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바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펼친 중립외교이다. 

1618년,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의 나라 후금은 명나라에 전쟁을 포고한다. 명나라는 후금과 전쟁을 하면서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의견이 둘로 나뉘게 된다. 한쪽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기 때문에 군대를 꼭 보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고 또 다른 한쪽은 “임진왜란의 피해로 나라가 어려우니 군대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명나라의 지원병을 보냄과 함께 조선군 총사령관인 강홍립에게 전쟁의 정세를 파악하여 “때를 보아 투항하라”고 지시했다. 명군과 싸우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며 조선은 후금에 대한 원한이 없으며 명나라의 요청으로 부득이하게 출병하였음을 밝힌다. 이후 후금과 휴전을 맺는 등의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여 조선은 명과 후금의 전쟁에 더욱 깊이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광해군의 이러한 중립적인 외교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은 광해군이 인조반정 이후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더욱 잘 보여진다. 인조반정 이후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후금을 배척하고 명에 대한 사대 정책으로 돌아갔다. 후금의 태종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고 조선은 전쟁의 패배로 후금과 마지못해 형제의 의를 맺게 된다. 이후, 후금은 청나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결국 조선은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게 된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가 지속되었더라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나라와 후금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성공적이었음은 틀림없다. 물론 동시에 광해군이 당시 중국의 정세를 읽어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강세 염두에 두고 중립 외교를 펼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점은 그가 중립 외교를 통해 조선이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청나라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나라의 힘을 잃다 

청나라가 1660년대에 명나라를 이기고 중국을 새롭게 지배하게 되자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아왔던 조선의 조정은 군신 관계에 따라 중국에 대한 사대 정책을 취하기로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두 나라는 사신들의 파견을 통해 활발한 문화 교류를 이어갔으며, 조선은 발달한 청나라의 문화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은 이후 조선은 왕조 말기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효과적인 외교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평가되는데, 힘을 잃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을 통해 이러한 면이 잘 보여진다. 1886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일본과의 관계를 지지하던 민씨 일가가 힘을 잃게 되고, 흥선대원군이 다시금 떠오르게 된다. 이때, 조선은 임오군란을 잠재우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조선과의 군신 관계를 내세우며 조선으로 군대를 보낸다. 청나라 군대는 흥선대원군을 군란을 선동한 배후자로 지목하여 납치하고 3년간 감금하였다. 이는 청나라는 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 했을 것이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조선의 왕실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청나라는 곧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청나라 관리들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과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함으로써 청나라 상인들의 내륙 무역을 허용등의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조선이 청나라에 너무 의존하게 되자,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 다른 나라들은 청나라를 통해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를 하려 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더욱이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조정이 스스로 인정하면서 조선이 쌓아왔던 외교와 자주성이 무너지게 된다. 

마무리 

조선 초기에 조선은 사대 정책을 취하면서 자신들의 자주권을 지켰고, 동시에 강대국인 중국과의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광해군이 명-청 교체기가 일어날 당시 중립 외교를 펼치며 명청 전쟁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독립된 나라로서 그 국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중국의 정세를 정확하게 읽지 못하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은 것이 화가 되어 새로이 중국의 패자가 된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만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중국에 치우쳐진 조선의 대외 정책은 결국 한반도에 대한 조선의 자주성을 약화시키고 만다. 이러한 외교의 실수로 한반도는 청나라와 일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나라로 전락하게 된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이용한 중립 외교는 지금의 대한민국 외교에 있어서 큰 중요성을 가진다. 중국과 미국, 그리고 전 세계의 나라들 사이에서 활발한 외교를 하는 대한민국은 중립적이고 균형 있는 국제 관계들을 형성하여 실리외교를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점점 커지는 한류의 영향력과 과학 기술을 이용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강대국을 향해 달려가는 대한민국에 사대 정책은 더 이상 적합한 외교 전략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학생기자 오세진(SA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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